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 1순위인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 읽었던 그 이야기가 가물가물해질 즈음 다시금 읽어보면 전과는 또 다른 감동을 받으며 두고두고 회자되곤 하는 소설입니다.
1919년 당시 헤르만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발간하는 것을 꺼려했기에 소설의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 라는 이름으로 책을 발간합니다. 이는 당시 독일이었음에도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했던 탓이었기 때문이란 말이 있습니다.
당시 데미안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모두가 싱클레어라는 무명작가의 정체를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이미 저명한 작가였기에 그의 문체로 인해 '싱클레어'의 정체가 금방 발각 되었고, 1920년 부터는 에밀 싱클레어가 아닌 헤르만 헤세 본인의 명의로 책이 발간 됩니다.
소설의 전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에밀 싱클레어는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란츠 크로머라는 불량스러운 아이에게 약점을 잡히고 맙니다.
싱클레어 : 내가 저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친 범인이야. 개쩔지?
크로머 : 그 과수원 주인이 너 잡아오면 돈 준댔어. 너 나랑 같이 좀 가자.
싱클레어 : 미안... 제발 그러지 마, 하라는 거 다 할게.
크로머 : 그래, 그러면 넌 나한테 빚진 거니까 휘파람 불 때마다 와서 돈을 상납하면 돼. 크크크
그런데 이를 어느 날!
전학 온, '막스 데미안' 이라는 아이가 아주 말끔하게 해결해 줍니다.
싱클레어는 훗날 상급 학교로 진학 후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영위합니다. 대개 친구를 잘못 만나서, 라는 이유를 대곤 하지만,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어디까지나 싱클레어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막스 데미안과 만난 싱클레어는 여전히 변함 없이 완벽하고 고결해 보이는 그를 못마땅해 합니다.
데미안 : 너 술집 자주 다니는구나. 정신 좀 차리는게 어떠니?
싱클레어 :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상당히 축약을 했지만, 아무튼 이러한 맥락의 대화를 나눕니다. 이런 질풍노도의 시기 때 싱클레어를 바로잡아 준 것은 '데미안'이 아니라
바로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
신곡을 쓴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가 평생을 두고 사모한 여인.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어느 날 우연히 공원에서 스치듯 본, 첫눈에 반한 한 여자였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그는 자신이 베아트리체라고 이름을 붙인, 사실 이름도 모르는 그 성숙해 보이는 소녀는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합니다.
그의 삶에 이제 데미안은 별로 필요가 없어진 듯 보입니다. 아마도, 이전 크루머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만은 그의 삶에서 잊혀지고 멀어질 일만 남았...
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캔버스 위에 그립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데미안 같은 거예요. 그림 실력이 그닥 좋지 못했다기 보다도, 사실은 자신이 옛 친구인 데미안을 몹시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카인 이야기.
"그럼 카인은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얘기야? 그럼 성경에 나오는 얘기는 또 뭐야? 성경이 거짓말이란 말이야?"
"답은 '네'와 '아니오' 둘 다야. 그런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잘못 기록되었거나 잘못 해석되었을 수도 있어. 내 말은, 카인은 원래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단지 그를 두려워하고 시기했기 때문에 그에게 누명을 씌웠을 수 있다는 거지.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카인과 그의 후예들이 그들과 보통사람을 구분하는 표적을 지녔다는 거야."
카인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데미안의 주장은 싱클레어를 흠뻑 도취시킵니다. 전에는 한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생각을 데미안은 하고 있었고, 그 이야기에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까지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르고 다녔겠지. 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막상 죽게 되자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는 거야.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떵러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건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어설픈 동화에 불과해. (중략)
나는 (데미안의 주장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까지 나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관련해서 단 한 점의 의혹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카인 이야기와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는 사실 기독교 철학에서 이미 심도있게 다뤄지고 정평이 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의 모순이 아닌, 남들이 알려주는 대로, 주입시키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게 아니라 자기 주체적으로 무엇이든 그것을 '의심' 해보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맹목적인 신념을 강요하는 '전체주의'를 반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 한 명의 등장인물,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피스토리우스가 말한 새로운 종교를 만들겠다고 말한 바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미신에 매료돼 있는 크나우어 역시 자신의 신념을 찾기 위해, 온전히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빗대어 볼 수 있죠.
종교란 본디 그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을 쫓고자 하는 '신념'을 믿고 따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신념과 종교는 일치된 개념으로 받아드려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데미안, 아니 소설의 저자인 헤르만 헤세는 바로 그 신념에 대해 회의적으로 묻습니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신념은 정말로 너의 것이 확실하느냐? 라고요.
싱클레어는 마침내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납니다. 자신이 캔버스에 그렸던 인물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사람을 만난 것인데, 그는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 이었습니다. 싱클레어는 에바부인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얻기 위해 고분분투하죠.
이 소설에서는 각 인물들에게 붙여진 이름처럼, 저마다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싱클레어는 이념적 가치관에 흔들려 방황하는 당시, 혹은 현대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것이고,
그런 싱클레어를 옥죄었던 크로머는 '악'을 뜻하죠.
그리고 그런 크로머를 싱클레어와 완전히 분리시켜 놓은 이는 '데미안' 바로, '이성(理性)'입니다.
또한 그런 이성의 어머니이자, 싱클레어의 진정한 베아트리체이자 갈망의 대상이었던 '에바부인' 그녀에게 담긴 뜻은 바로 '이상(理想)' 입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이상인 에바부인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그녀의 아들인 데미안(이성)과 더욱 가까이 지내고, 그와 같아지려하는 모습은 우리가 '이상'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노력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는 소설에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알을 깨고서 세상으로 나와 비상하는 새의 심상으로 비유됩니다.
전쟁
소설이 발간 되었을 당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혼란한 전국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훗날 추앙받는 모든 작가들이 그랬듯 헤르만 헤세 역시 군국주의와 전체주의가 일으킨 그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에 대해 꼬집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이상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적은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이상은 한 개인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강제된 이상이었다.
당시 헤르만 헤세의 모국인 독일의 예술가들이 전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수많은 예술작품을 만들어 선전선동에 앞장섰지만 그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기에 배신자라고 낙인 찍히기도 하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 시대의 대중들을 전쟁의 광기로 몰아 넣었는지는 훗날 여러 해석이 즐비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진단은 바로 '개인주의'의 말살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에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은 사회적 '대의'보다 못하기에 모두가 사회에 맹목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강요가 통용되던 그 시대에서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미치광이들의 예쁘게 포장된 말들을 아무런 의심없이, 비판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소설 속의 데미안과 저자인 헤르만 헤세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 것입니다.
의미, 사유 그리고 그릇
소설은 여러 그릇들을 한 데 모아놓은 식탁과도 같습니다. 그릇은 소재나 등장인물을 말하고, 이야기는 그 그릇의 생김새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들에 무엇을 담을 지는 오로지 독자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제가 작성인 이 포스트 역시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그 그릇에 담는 내용물을 남이 대신 담아주길 바라는 경향을 띌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각종 언론 매체, 미디어, 유튜브,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 등과 같은 곳에서 타인이 적어놓은 글들을 별 생각 없이 곧이 곧대로 받아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 작은 태도들 부터 경계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점점 자신만의 '데미안' 이 되어 갈 것이고 마침내 운명의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겠죠.
이 데미안이란 소설, 아니 이 그릇에 여러분은 어떤 자신만의 생각을 담아내셨나요?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깊이 돌아보게 되고, 그것을 의심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소설 '데미안' 혹시 아직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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