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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문학이 죽음을 소재로 다루는 방법

by Shark_ 2020. 6. 22.

<프랑스 문학가 - 프랑스와즈 사강>

프랑스와즈 사강

그녀가 공항에서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된 이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한국의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인용합니다. 그 소설이 바로 그 유명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입니다.

이 소설에는 제목 뿐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 묘사를 아주 심플하고 세련되게 대체하고 있는 여러 미술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소설에는 삽입된 그림이 없으니 이번 포스팅을 통해 미리 어떤 그림인지 알고서 소설을 감상하면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

 

1. 마라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 마라의 죽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는 소설이 처음 발간 되었을 때는 책 표지가 바로 이 명화로 돼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특히나 책 제목 탓에) 욕조에서 손목을 그은 다음 열심히 유서를 쓰고서 최후를 맞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프랑스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던 '장 폴 마라'(남자) 라는 인물이 피부병으로 약물 목욕을 하는 중에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성에 의해 살해당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사건의 배경은 당시 격변기를 맞이하는 프랑스의 격렬했던 '당파싸움' 으로 축약할 수 있는데, 당시 그를 살해한 샤를로트 코르데의 나이는 25세였으며 그녀 역시 체포되어 일주일 후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습니다.

훗날 이 사건을 토대로 화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그려진 마라의 죽음(위에 그림)이라는 그림이 발표되었을 당시, 정치적 선전선동을 위한 복제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다고도 하네요.

 

2. 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 - 유디트 (잘 보면 오른쪽 아래 사람 머리 들고 있음...)

저는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등장인물을 대뜸 '유디트'라고만 지칭해서 굉장히 늠름한 남자를 떠올렸는데 아니었습니다...

(해군 특수부대 UDT를 떠올리는 바람에...)

모르면 그럴 수 있어요...

팜프파탈의 대명사 유디트.

아마 카톨릭 신자라면 많이 들어봤었을 성서속 인물입니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유딧기'는 현재 기독교나 유대교에서는 '외경'(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취급하나 카톨릭에서는 제 2 경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 팜므 파탈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디트는 유대의 산악도시 베툴리아에 살았던 아름답고 정숙한 과부였는데, 홀로페르네스가 지휘하는 아시리아 군대가 베툴리아를 침략하자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아시리아 군에 거짓으로 투항하여 연회를 즐깁니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와 단 둘이 남게 된 유디트는 만취한 홀로페르네스가 잠들자 그의 칼로 그의 목을 베어 하녀와 함께 수급을 거두고 날아납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 신화적 영웅담에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절세미인에게 유혹당한 아시리아의 장군이 정말 그녀가 주는 술에 취해 잠만 잤겠느냐, 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윽고 유딧이 들어가 앉았다. 그러자 유딧 때문에 홀로페르네스의 마음은 들뜨고 정신은 아뜩해졌다. 그는 유딧과 동침하고픈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를 처음 본 날부터 유혹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딧기 - 12:18

물론 유딧기에 이 다음 구절들에서 유디트 본인은 이를 부정하지만, 당시 아시리아라는 강대국 군대의 총사령관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그 수급까지 빼앗기는 상황에서 그것을 저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어떠한 비밀스러운 이유로 호위를 물렸다는 의미이지 않겠느냐, 라는 견해로 좁혀졌고, 이는 자신의 조국을 구한 영웅이며 성녀를, 후대에 이르러서 점차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남자를 파멸시킨 팜므 파탈(요부)의 이미지로 덧 씌워지게 된 배경이 됩니다.

 

3. 사르다나팔의 죽음

들라크루아 - 사르다나팔의 죽음

고대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은 반란군에게 패배합니다. 그는 적들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은 평소 자신을 즐겁게 해주었던(애첩들을 비롯한) 모든 것(?) 들을 데려가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살고자 하는 애첩들을 자신의 충복들을 시켜서 모조리 죽입니다. 그림을 보면 몇몇 애첩은 왕과 함께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침대에 엎드리고, 오른쪽 상단에는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도 보입니다. 그리고 왼쪽 하단도 자세히 보면 왕이 타던 도 흑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앗!

또한 이 그림의 주인공 사르다나팔이 누워있는 저 침대는 사실 아래에 장작더미가 잔뜩 쌓여있습니다. 사르다나팔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이 모든 일들을 건조한 표정으로 관망하다가 마지막에 침대 아래로 쌓아놓은 장작에 불을 지펴 자살합니다.(참고로 이 과정은 모두 화가의 상상이라고 합니다.)

 

위에 소개해 드린 그림들의 공통적인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는 이 '죽음'이란 소재로 아주 파격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냅니다. 소설에서는 '자살 안내인'이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나'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에게 생의 마지막을 위탁한 연인들에 대한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소설의 주요 소재가 '자살'인 만큼 이 작품 좋아요! 라는 식으로만 리뷰를 하면 자칫 자살권장 포스트가 될 수 있기에, 굳이 이 포스트에 대한 주제를 명시하자면 문학이 죽음이란 소재를 다루는 법, 정도로 봐주시면 정확합니다 :)

그리고 사실 위에 그림과 소설 인문들의 상관관계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저 인물들의 이미지와 부위기를 위의 작품들과 이어놓았을 뿐 소설 속 인물들과 위 그림 속 인물들은 완전히 별개의 인물들입니다.

아래는 소설에 '나'라는 인물이 벨베데르 궁전에 있는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전시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를(위 2번 그림) 보면서 늘어놓는 감상평입니다.

 

유디트의 육체는 시체로 보인다. 시체치고는 너무 매혹적이다. (아니면 시체이기에 더 매혹적인지도 모른다.)

김영하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작가는 , 유디트라는 인물의 퇴폐미를 죽음(시체)과 연결시킴으로써, 이 끔찍한 현실 속에 사는 누구나 사실 '죽음'을 (마치 유디트의 퇴폐미처럼) 갈망하곤 있지만 차마 그리로 발걸음을 향하기 어려운, 허나 치명적이게 매력적이라는, 꽤나 위험한 묘사를 명화와 교묘하게 결부시켜 세련되게 우회해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연'이라는 여자에게 단지 '유디트' 라고 지칭하며 인물의 팜므 파탈적 이미지와 죽음을 갈망하는 이미지를 아주 손쉽게(?) 그려냅니다.

캠코더를 든 관광객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여기저기를 훑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비디오카메라는 블랙홀처럼 궁전을 삼키고 궁전 앞 연못을 빨아드린다. 그들 기억 속의 벨베데르는 흐릿하고 푸른기 감도는 사각의 영상으로 수렴된다. 그들은 기억의 불멸을 꾀하느라 생생한 현재를 희생한다. 처량하지만 인간의 숙명이다.

김영하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나'의 관점에서 유디트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묘사되는 또 하나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행위예술가인 '유미미'라는 인물인데, 그녀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남자 C와 작업을 하면서 촬영된 자신의 이미지가 C의 프레임 속에 갖혀서 영원히 박제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소설에서 비디오촬영이 불멸을 꾀하는 행위로 묘사된 것을 감안하면 미미는 그 불멸을 거부한 셈입니다. 그것은 소설의 태도이자 '나'의 관점인, '진정한 아름다움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라는 식의 그 골자를 같이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피의 분출은 '시(詩)이다. 그건 막을 도리가 없다." 그 시를 쓴 그녀는 가스오븐의 밸브를 열어놓고 자살했다. 내 고객들도 실비아 플라스 같은 문재(文才글재주)를 지니지 못했을 뿐, 삶의 마지막을 그녀만큼의 아름다움으로 장식해냈다.

김영하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이러한 부분을 보면 죽음을 찬양하는 일본 문학과도 상당히 매치가 되기도 합니다. 일본 문학의 '죽음에 대한 찬양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책임하에 완결짓는 행위에 대한 숭고함을 말한다곤 하지만, 헷갈려서는 안되는 게, 이는 대개 도마 안중근과 같은 위인의 숭고한 죽음 같은 게 아니라 비참하고 추악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에 대한 '해명' 내지 변명을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완결짓는 동시에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맥락적 의미가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작품들은 결코 독자의 자살을 독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킬빌이나 쏘우같은 영화가 살인이나 범죄를 독려하는 게 아니듯 말이죠.

이러한, 윤리적 잣대를 거부하는 일탈적이고 퇴폐적 성향의 작품들은 찾아보면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쿠엔틴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나 세간에 잘 알려진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 뮤직비디오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뚜렷한 색채를 지닌 하나의 '장르' 정도로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이따금 소설 화자와 작가를 동일인으로 단정짓거나 작중 인물에 너무 빠져들어 그 인물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행위들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네요. (실제로 제 주변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건강한 독서을 영위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행위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언제나 적정선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_ :)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때문에 가끔 이상한 전화나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그 소설에는 자살 안내라는 좀 특이한 일을 하는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독자들 중에는 작가인 나와 그 자살 안내인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대뜸 전화를 걸어와서는 자신이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뭐 해줄 말이 없느냐는 식이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그러겠는가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이다.

김영하 단편소설 - 흡혈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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