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흑사병)
흑사병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옮겨져 발생하는 급성 열성 감염병
아마 저는, 페스트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박진감 넘치는 의학 스릴러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영화 아웃브레이크처럼 말이죠.
제목을 보고 소중한 사람들이 페스트라는 무서운 전염병에 감염되어서,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혈청을 연구하고 갖은 노력 끝에 결국엔 그들을 살려내는 휴먼 드라마를 쉬이 떠올렸고, 그렇게 저는 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열어봤는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알베르 카뮈라는 것을 조금 뒤늦게 확인했을 때 알아차릴 법도 했는데, 그 순간에도 저는 "까뮈가 이런 것도 썼어?"라는 의아함과 기대감으로 한 줄 한 줄 텍스트를 읽어 나갔습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무게에 새삼 질겁했던 것은 그런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최대한 절제 돼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황홀했던 표현들과 시대를 아우르는 뛰어나다 못해 정교한 통찰력에 혀를 한참 내두르긴 했지만, 정작 이 책을 읽고서 내 안에 드는 감상은 무엇일까를 정리하는 데 꽤나 한참이 걸렸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해요. 아주.
지금의 알제리.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오랑'이라는 항구도시에서 페스트가 발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잡한 플롯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은 누구와 누구와 누구들이 서로 연대하여 그 페스트와 끝까지 싸워나간 이야기에, 그 상황과 인물들의 깊은 내면을 담담하게 풀어놓습니다. 단지, 그뿐인데도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이에요. (근데 쪼까 어려워용. 쪼까 많이...)
알베르 카뮈.
저는 포스팅 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tvn에서 방영하는 '책 읽어 드립니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소설을 다룬 화를 유튜브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히 풀버전을 볼 수 있었어요.
역시나, 명불허전 설민석 강사님이 너무 재밌게 잘 풀이해 주시더군요.
But...
최대한 핵심만 뽑아서 말하느라 각색이 많이 되어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실제 내용이 왜곡될 여지가 많았고, 또한 그 설명만으로는 저자의 의도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도 범접할 수 없으니, 만약 당신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대해서 담론을 나누고 싶다면 반드시 꼭 읽어보길 권하는 바입니다.
소설에는 이렇게 따져묻는 장면 없어용. 비슷한 장면이 있지만 방송에서 표현된 원망의 뉘앙스와는 '아주아주' 다릅니다.^^;
이 소설은, 어느 한 구석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거의 병적으로 취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소설에서, 작가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식의 뚜렷한 메시지가 보이질 않아요. 때문에, 그러한 부분이 여느 독자들에게 난해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얘기임
(이렇게 봐도 말이 되고, 저렇게 봐도 말이 되니 뭘 어떻게 포스팅 해야할지 참 난해했습니다...)
이 소설이 페스트 창궐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했음에도 중립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성향의 등장인물들 덕분이에요. 의사, 성직자, 기자,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 그리고 범죄자등등의 캐릭터들이 페스트 창궐이라는 재앙과 맞닥 드렸을 때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 시대를 아우르는 인간군상을 기가막히게 꼬집습니다.
이를테면,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신념적 대립이라든지, 재앙 속에서 헌신하려는 자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익을 취하려는 자의 대조 등이 그렇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특정 장면이나 대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주제도 다 다르게 비춰질 수 있어요. 말하자면, 독자 저마다의 다양한 생각을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이 아주 어마어마하게 큰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음... 그래...
뭐 아무튼, 무슨 소설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냥 본인이 느낀대로 받아들이면 장땡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느끼고 받아드린 바는 대체 무엇이냐?
바로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몇십 년간 가구나 속옷들 사이에서 잠자코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헌 종이 같은 것들 틈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일러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가지고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 페스트 中
위에 발췌글은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여기서, 카뮈가 말한 페스트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아직 가시기 전이었던 당시인 걸 감안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참혹함 속으로 몰아넣었던 나치즘의 전체주의를 빗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아마 어쩌면 저도 그렇게 해석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페스트는 지금, 이 포스트를 열람하는 모든 사람들, 즉 우리 세대에는 너무나도 먼 과거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만에 하나, 천만의 하나의 확률로 그것이 다시 창궐하더라도, 현대 의학 기술로 충분히 그것을 방역해 내어 우리의 삶에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철석같이 믿었을 거예요. 오늘날, 코로나 19가 창궐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코로나 19 이전에 생계에 관하여, 혹 물가가 갑자기 치솟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할지언정, 혹 올여름에 전염병이 돌면 어쩌지?라고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올봄에 맞이하는 새 학기를 염려하는 학생들은 많았을 것이나, 올봄에 개학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죠.
하지만 코로나 19가 창궐하면서 평소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많은 활동들이 제한되었고, 그로 인해 일상생활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정말 소설 같은 데에나 나올법한 상황처럼, 정말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란 그나마 적게 죽은 편...)
소설 페스트에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상황이 '오랑'시에서 벌어져요. 그런데 코로나 19는 소설이 아니죠. 정말 유감스럽게도, 현실입니다.
코로나 19는 소설 페스트에서의 페스트처럼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실존주의자, 실증주의자, 회의론자, 염세론자 가리지 않고 감염시켰으며,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것은 '오만'이었습니다.
안일함과 익숙함으로 평소 누리고 있던 것들을 당연시 여겼던 오만.우리네 삶은, 오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건 단지 코로나 19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벌어진 비극일 뿐이다,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전혀요.
'우리나라'만 해도 한 해 동안, 평균, 3,000여 명의 사람들이 독감으로 죽고, 3,300여 명의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그리고 무려 80,000여 명의 사람들이 암으로 죽습니다. 누구든, 언제든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한 순간에 반신불수가 될 수 있으며, 주말 오전,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책이나 읽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거나 다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시기에 우리가 뜻하지 않게 편의점에 라면 한 봉지 사러 갔다가 코로나 19에 감염될 수 있듯이 말이죠.
우리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갈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사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뿐더러,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언제든 한 순간에 휙! 하고 사라질 수도 있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 19 덕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 가족들과 함께 대면하는 시간이 이전보다 늘어나고, 그동안 연락을 미뤄왔던 지인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소중한 가치에 대해 되새기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뭐가 그리도 바빴기에, 이토록 소중한 가족들, 친구들을 등한시했는지, 뭐가 그리도 중요하기에 그들을 우선순위에서 당연하게 제외시키곤 했는지, 코로나 19 덕분에 그런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많이 반성도 하게 되었어요.
소설에 주인공 리외(리유라고도 번역함)는 지병이 있는 아내를 요양 보내 놓고 페스트와 싸우느라, 결국 아내가 죽는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리외와 함께 페스트와 최전선에서 싸웠던 타루도 페스트에 걸렸고, 파늘루 신부 역시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목숨을 일었습니다. 페스트와 최전선에서 싸운 주인공들 중 오직 랑베르만이 사랑하는 아내와 재회할 수 있었는데,
저는 이게, 작가가 사랑하는 사람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있었던 랑베르의 신념에 손을 들어주었던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알베르 카뮈 작품에서 항상 강조하는 인간의 모순이 어떻든, 소설 속 파늘루 신부의 말처럼 페스트나 코로나 19가 신의 형벌이든, 아니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면 이토록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고 의미일까요.
우리는 다만,
그저 자신의 삶에 소중하게 자리하고 있는 그들을 성심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페스트나 코로나 19만치 잔인하고 끔찍하게도 허무한 우리네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이 힘든 시기도, 소설 페스트에서처럼, 언젠간 종식될 날이 올 거예요.
그러니 우리 모두 힘냅시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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