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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리뷰

영화 「설국열차」 제대로 된 스포일러 리뷰!

by Shark_ 2020. 6. 5.

 

 

넥플릭스에서 5월 25일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드라마 설국열차는 새로운 스토리와 더불어 동명의 원작 만화(Snowpiecer)의 설정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보다 훨씬 착실히 옮겨 놓으며 영화와는 또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는데요. 두 시간 안에 결판을 지어야 하는 영화완 달리 인물 각각의 에피소드와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는 드라마로서의 재해석이 과연 시청자들의 마음을 얼마나 충족시켜 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반응은 영상미는 화려하나 영화에서 시사한 계급사회의 혹독한 질서와 모순 등의 주제의식에는 조금 못 미친다는 평이 있는데요. 같은 원작을 재해석해낸 만큼 영화와 드라마를  비교하는 호불호 논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네요.

이 포스트는 201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의 내용과 해석을 정리한 스포일러 리뷰입니다. 넷플릭스에 드라마 설국열차 방영을 기념하여 우리 한 번 복습해 보아요:)

 

 

영화 설국열차 Intro 장면 中

 

CW-7의 대량살포 직후, 거대한 한파가 세계를 덮쳤다. 새로운 빙하기.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멸종되었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방주에 탑승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들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다.

-영화 설국열차 Intro 자막 中-

 

세계 78개국이 지구 온난화 방지책으로 대기권에 살포한 'CW-7'의 부작용으로 지구에 전례 없는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하게 됩니다.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얼어 죽고, 전 세계에 걸쳐 건설된 438,000km의 순환 선로 위를 달리는 초호화 자가발전 열차, 일명 설국열차에 탑승한 승객만이 온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는 혹한의 재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차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차의 맨 뒤 화물칸, 즉 꼬리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죠. 그들은 정식으로 티켓을 끊고 탑승한 승객이 아니기에 열차에서 그들에게 가하는 대우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할뿐더러 식량으로 제공되는 것은 마치 사료와 다를 바 없는 정체불명의 양갱 단백질 블록 뿐입니다.

 

영화 설국열차 - 단백질 블록
이 사람 머리 가발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열차가 죽음의 혹한 속을 질주한 지 어언 17년. 꼬리칸 사람들은 머리칸 권력의 탄압과 착취에 맞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영화상에서는 이번이 세 번째 반란이며, 반란 주도자인 캡틴 아메리카 커티스(배우 크리스 에반스)가 인류 최초로 꼬리칸에서부터 열차의 맨 앞인 엔진칸까지 도달한 여정을 영화는 아주 차갑고 냉철하게 그려나갑니다.

 


 

영화 설국열차 사운드 트랙 포스터

같은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계급 사회의 은유를 위아래의 수직적 형태로 디자인했다면, 그보다 앞서 개봉한 설국열차는 수평적이면서도 일방적인 방향과 그 형태로 의미를 담습니다. 그 의미는 바로 계층의 이동인데, 기생충의 경우, 기택네가 박사장 네 집을 칩입해 나가는 것이 자본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설국열차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불안정한 환경에 의해 극단으로 치닫는 비인간적인 행태로부터의 저항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18년간을 창문도 없는 꼬리칸에서 지내온 커티스와 일행은 엔진칸을 향해 앞으로 전진하며, 맞닥뜨리는 소위 상류 계층의 모습은 꽤나 충격적입니다.

팔짜 조쿠나...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유치원 칸에 당도했을 때일 겁니다. 

수업 내용은 단조롭기 그지없습니다. (뭐 유치원 수업에서 뭘 바라겠느냐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열차의 설계자이자 제작자인 윌포드를 향한 찬양과 열차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세뇌교육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이 교육은 정해진 선로 위를 그저 한 방향으로만 내달리는 열차처럼 일방적이고 폐쇄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영화 설국열차 유치원 선생님 역 / 배우 알리슨 필. 이분 연기 너무 잘하심..

열차 안에서 나고 자란 '트레인 베이비'들에게 이러한 세뇌교육이 이뤄지는 배경은 열차가 달려온 17년간의 세월 동안에 일어난 몇 번의 반란(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 때문임을 추측해 볼 수 있어요.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는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선로를 가로막고 있는 눈덩이들을 돌파해 나갈 때는 열차가 선로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만 같고, 언제 산사태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눈 덮인 산맥을 가로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약 반란이 일어나 사고로 열차 중간에 큰 내부 폭발이라도 일어난다면 열차 안에서 생존하고 있는 인류의 반을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잠재되어 있을 열차 밖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의 새싹부터 아예 잘라버리는 겁니다. 

열차는 낙원이 아닙니다.

그게 꼬리칸 때문만은 아니죠. 폭이 3미터 남짓한 공간과 공간을 이어놓은 곳에 오고 가며 생활해야 한다는 건 정말 끔찍합니다. 아마도 열차 앞칸에서 자행되는 세뇌와 향락은 차창 밖의 싸늘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 행위처럼도 보입니다. 그 비좁은 열차 속에서 온 인류가 안위하고 살아가려면 아마도 제정신을 배제해야 할 테니까요.

 

결국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열차의 엔진칸.

커티스는 그곳에서 윌포드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 듣습니다. 바로 꼬리칸의 성자라고 추앙받았던 길리엄이 윌포드와 한패였다는 것이었죠. 윌포드는 캡슐 속에 편지를 넣어 단백질 블록을 통해 꼬리칸으로 전달했고, 길리엄은 그 메시지로 하여금 커티스가 반란을 도모하도록 은근슬쩍 부추겼던 것입니다. 애초에 커티스가 일으킨 반란은 열차 시스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인구수 조절 정책의 일환이었던 거죠. 마치 수족관의 폐쇄된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물고기의 개체수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통제하기 위해 일 년에 두 번 스시집을 오픈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겁니다. 원래는 예카테리나 터널을 지날 때에 그 어둠 속에서 반란은 진압됐어야 했지만, 꼬리칸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맞선 것이 변수였죠. 그 때문에 커티스는 가까스로 엔진칸까지 도달할 수 있었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이 이런 끔찍한 대학살을 계획했다는 것에 충격에 빠진 커티스는 자신의 동료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엔진칸에 도달한 것에 대해 깊은 회의감에 젖고 맙니다.

 

자기 자릴 지키는 사람들로 가득한 수많은 칸들 그게 모여서 뭐가 되지?  바로 기차야.

그리고 정해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확한 수의 사람들이 모이면 뭐가 될까?

바로 '인류'지.

영화 설국열차 윌포드의 대사 中

 

윌포드는 회의감에 빠진 커티스를 설득합니다. 열차에 존재하는 계급과 시스템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걸 말이죠. 그리고는 그에게 제안합니다. 자신은 너무 늙고 지쳤으니, 이제 나 윌포드에 이어서 설국열차의 기존 시스템의 새로운 리더가 되어달라고 말이죠.

 

우리는 윌포드에게 거의 설득당할 번했던 커티스가 갑자기 마음을 돌린 계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이 장면.

 

엔진칸 바닥에서 기름찌꺼기를 손으로 건져내고 있던 아이.

엔진이 영원할지는 몰라도, 엔진을 구성하는 부품은 고장 나기 마련입니다. 그 부품이 멸종하면 부품이 자리했던 비좁은 곳에 세뇌시킨 어린아이를 집어넣어 그 부품을 대체하고 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행위는 자신을 친형처럼 따르던 어린 애드가의 목숨을 뒤로하고 대의를 위해 앞으로 전진했던 커티스의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설국열차를 지배하는 윌포드 역시 인류의 생존이라는 대의를 위해 열차가 멈추지 않도록 유지해야 했고, 그를 위해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킨 것일 테니까요.

'아이'는 미래를 상징합니다.

현재의 생존에 안위하려 미래를 희생시키는 모습과 맞닥 드린 커티스는 결국 윌포드를 떼려 눕히며 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비좁은 열차 속 폐쇄된 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윌포드의 말대로 균형을 위해 정확하고 엄밀한 통제 속에서 살아야만 가능합니다.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그 희생을 집행해야 합니다. 열차가 멈추지 않는 이상 비극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마치 출구가 없는 터널을 내달리는 것처럼 말이죠.

예카테리나 터널. 열차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 안을 달리고 있을 때, 챈이라는 어린아이가 성냥에 불을 붙여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힙니다. 영화에서 아이가 미래를 상징한다면, '불씨'는 희망을 뜻합니다.

'희망'은 미래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무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성냥불을 붙이는 주체가 어른일 때는 담뱃불을 붙이는 데에 소모되는 반면,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일 때는 그것이 횃불이 되어 전세를 역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고, 열차(시스템)를 전복시키는 폭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은 발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 마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까지. 단지 시각적인 유희뿐만 아니라, 영화가 선사하는 의미를 재해석해 내는 즐거움을 주는 명작을 그는 매번 만들어 냅니다.

아직 그의 행보는 진행 중이라는 것에 한껏 미소가 지어집니다. 아직 영화 설국열차를 보지 못하신 분들, 혹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신 분들은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설국열차를 보시기 전에 먼저 한 번 감상해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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